중국 시안 출장 가기 전,

도서관에 들러 책을 잔뜩 빌렸다.

책 5권을 다 읽으려면 어떤 책을 빌리는 게 좋을까 하다가,

내가 작가하는 작가이자, 읽기 쉬운 정이현 작가의 책을 선정했다.

달콤한 나의 도시 이후 정이현 작가 책은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정이현 소설을 읽다.

밝지만, 깊고, 특유의 자조섞인 문체는 여전했다.

이래서 정이현 작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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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너는 몰랐다. 제 안의 욕망을 냉랭하게 응시하는 일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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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네가 얼마나 복 받은 아이인 줄 모를 거다. 행복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지?

행복이라니. 그것은 국어 교과서에나 나오는 간지럽거나 비현실적인 표현이 아닌가. 너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모르니까 행복한 거다. 언젠가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종이 냅킨으로 이마를 꾹꾹 눌러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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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듯 시간은 규칙적인 속도로 흘러갈 것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너는 열다섯이 되고 스무 살, 서른두살, 마흔일곱 살...... 차곡차곡 늙어갈 것이었다. 

시간의 가장자리에서 지금처럼 어느덧 기진맥진해질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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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죠. 운명의 장난을 극복하고 다시 행복해지겠죠. 드라마니까. 이야기의 원형은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아요.

대중은 강렬하고 극적인 스토리를 원하죠. 물론 그 기준은 점점 높아지지만 중심축은 변하지 않아요.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을 것. 연약한 두 어깨에 고통을 짊어지고 맞서는 동안 주인공은 더욱 완전한 인간으로 진화해나가야 하죠.

 운명이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없이는 아무도 자기 길을 찾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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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다는 듯 남자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저 사람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건 행복하면 되는게 아닙니까.

어떤 인간도 결국 자기가 믿는 대로 살아갈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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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을 줄 알았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유행보다 더디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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